익산에 가는 KTX를 탔습니다. 지금 시각은 4시 55분이고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어요. 신기하게도 이 기차 칸에는 꽃다발을 든 사람들이 두 명이나 있습니다. 비어 있는 좌석이 아직 많은데도 말이죠. 나도 모르는 사이에 11월의 첫날에는 꽃을 주는 문화가 생긴 것인가. 꽃다발을 든 채 기차를 타는 기분은 어떤 걸까 생각했어요. 타고 가는 내내 그 꽃다발을 받고 기뻐할 누군가의 얼굴을 상상하며 설레는 마음일 수도 있고, 일단 받긴 했지만 캐리어와 큰 가방을 들 손도 모자란데 꽃다발까지 들기엔 버거운 기분일 수도 있겠지. 그래도 전자의 경우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로맨틱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지역에 도착해서 꽃다발을 사는 게 아니라, 굳이 내가 있는 곳에서 네가 있는 곳까지 들고 가서 건네주는 마음. 그냥 단순히 우리 동네 꽃집 사장님이랑 친해져서 산 걸 수도 있겠지만. 

 추석 연휴에 잠깐 쉬어야지, 하고 쉬었더니 한동안 <망고네 슈퍼>를 안 쓰게 되더라고요. 그동안 바쁘게 살았던 것도 맞지만요. 주말 출근을 자주 했고, 새로운 걸 하고 싶다는 생각에 시 수업을 듣기 시작했어요. 여름 휴가도 제대로 안 갔어서 뒤늦게 연차 소진을 하기 위한 여행 계획도 세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를 많이 봤어요. 주술회전도 보고, 체인소맨도 보고, 그저 사고였을 뿐도 보고, 원배틀 애프터 어나더도 보고, 어쩔 수가 없다도 보고. 이제 곧 문을 닫게 될 극장의 마지막을 기념하기도 했고, 영화 상영 시간보다 길게 이어지는 GV를 들으며 저토록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이란 뭘까 생각했고, 전석 리클라이너인 극장에서 아무래도 익숙한 극장 의자가 좋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집과 회사와 CGV와 메가박스와 씨네큐브를 오가는 10월이었는데요. 그 정도로 영화를 좋아하는 건 아닌데... 부지런히 부정했지만 좋은 영화들 틈에 껴있는 기분이 좋더라고요. 각자만의 방식으로 꾸려진 엔딩크레딧을 오래오래 보는 기분도. 

 오늘 간 시 수업에서는 이런 자기소개를 시키더라고요. 내 이름과 연말 계획에 대해 이야기해보라고. 수업에서는 다음주 휴가라서 일본 나고야에 간다고, 부랴부랴 짧게 한줄로 요약해서 말했는데요. 지금 떠오르는 연말 계획은 겨울 바다에 가서 해가 지는 파도를 보고, 적당히 시끄러운 횟집에 가서 매운탕을 끓여먹고, 아주아주 뻔한 로맨틱코미디를 보다가 잠들고 싶어요. 올해 뭐가 좋았는지 싫었는지 회고한다거나 새해엔 뭘 하고 싶다고 계획을 세우는 건 다 미뤄놓고, 뻔하게 좋은 것들로만 채워서 한 해를 마무리하기. 뻔하게 좋은 걸 한다고 해서 뻔하게 좋지는 않을 테니까. 얼마 전에 쓴 시를 읽은 사람들은 좀 더 일상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해도 되겠다, 더 멀리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해도 좋겠다고 하더군요. 자유롭고 더 멀리 가는 이야기를 쓰고 싶지만, 그런 상상과 시도 자체가 즐겁지만, 사실 저는 요즘의 일상이 좋아요. 연말까지는 덜 모험적으로 살아야겠다... 전형적인 것들을 좋아하면서 지낼래요. 오랜만에 쓰는 만큼 전형적인 근황 공유를 해봤는데, 다들 이 계절을 어떻게 보내고 계시나요? 

 Ps.  짧은 익산 여행을 마치고 덧붙이는 글. 집에 놀러온 손님에게 제공해준 체크잠옷의 은은한 섬유유연제 향, 맥도날드에 진출한 익산 고구마의 보슬보슬한 촉감, 꽝꽝 언 얼음을 가득 담아준 드립커피의 맛. 아침을 차려주는 다정한 마음이 좋아서 나도 언젠간 아침을 차려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다짐한 주말! 

망고네 슈퍼 주인장 드림 

 

 사실 헛소리를 좋아합니다. 헛소리의 범위는 굉장히 넓고, 헛소리의 취향도 굉장히 다양하지만요. 취향에 맞는 헛소리를 발견할 때 즐겁습니다. 요즘 볼 때마다 즐겁다... 라는 생각을 종종 하는 콘텐츠를 가져왔는데요. 배우 고창석님이 감독으로, 뮤지션 오존님이 조감독으로 등장하는 현실과 픽션 사이 그 어딘가를 표방하는 채널인데요. 일단 무슨 조합인지 알 수 없는데 묘하게 잘 어울리고, 보다 보면 어디까지가 연기고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자유분방한 헛소리의 즐거움이 있어요. 도대체 무슨 영화가 만들어질지 알 수 없지만 배우들이 오디션을 보러 오고, 가끔은 감독과 조감독 둘이서만 회식을 하거나 캐스팅 논의를 진행하는데요. 사실 저는 수다 떨다가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이거 완전 영화 시나리오 한 편 다 썼다!' 호들갑 떠는 순간들을 좋아하거든요. 로맨스물에서 사이코물이 되고, 적당히 베껴서 제작비를 절감하고, 음악은 오존 노래를 갖다쓰는 등 헛소리에서 출발한 이야기들이 언젠가는 꼭 영화로 만들어지는 결말이길 바라며... 이 시리즈의 엔딩까지 챙겨볼게요🍎

 고등학교 몇 학년 때였던가. 수학 선생님이 학년 초부터 입버릇처럼 실없는 농담을 했는데, 그 농담은 '내일모레면 크리스마스에요'였다. 우리는 허무개그 듣듯이 그냥 어이없어했는데, 정말 찬바람이 불고 동복으로 갈아입고 나서는 '내일모레면 크리스마스에요'라는 농담에 다 같이 울상으로 '흐응~~~'하고 반응했던 기억이 난다. '정말 한해가 다 가버렸어!!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지?? 어떡해... 나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같은 마음이었겠지. 그날 이후로 우리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그냥 매일 똑같이 살았고, 수학 선생님의 농담에 '흐응~~~' 하고 울상을 지었고, 뭐라도 해보려고 '으쌰!' 했다가 그냥 도로 말았다. 그렇게 나는 어른이 되고 마흔이 넘어 일흔이 된 엄마랑 통화를 하다가 이 글을 쓰고 있다. 삶이 끝나간다. 이 글을 쓰고 읽는 우리 모두. 이 글을 쓰고 있는 우리 모두의 옆 사람, 뒷사람, 앞사람 모두 어쩌면 지금은 멀게 느껴져도 언젠가 문득 '흐응~~~' 하고 울상을 지을 것이다. 

 그런데 이걸 알아도, 나는 이번 추석에 공연 때문에 촬영 때문에 고향에 안 내려갈 거고, 엄마는 조카가 대학에 갈 때까지는 복지관에 안 갈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루하루의 삶은 죽을 운명에 맞설 만큼 이토록 힘이 세다. 일상이란 필사의 운명을 망각하려는 삶의 지혜일까, 아니면 필사의 위력에 맞서려는 인간의 속절없는 분투일까. 그것도 아니면 필사의 슬픔을 이기는 생의 기쁨일까? 어쩌면 필사의 두려움 앞에서 필사적으로 파고드는 신체적 피난처일지도.  

 11월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채로 11월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믿을 수 없다고 중얼거리며 11월 초를 보내고, 아무 변화도 없이 매일 똑같이 살다가 '이게 무슨 일이야! 벌써 12월이잖아!' 하고 있겠죠. 이렇게 보내는 하루하루의 삶이 죽을 운명에 맞설 만큼 힘이 세다는 말이 좋아서 가져왔습니다. 오프닝에도 마침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썼는데요. 이번 해에 대단한 걸 하진 않았지만, 그냥 이대로 한 해가 마무리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지도 않고, 대단히 괴롭지도 않고, 그냥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지내는 상태. 가끔 무너질 때도 있지만 잘 쌓아놓은 일상의 틀을 지키는 상태. 좋아하는 사람들의 맑은 얼굴을 보면서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이 있는 상태. 가끔은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상태. 그렇지만 뭔가를 더 하진 않겠죠. 그래도 그렇게 굴러가는 일상이 좋고, 그런 일상을 굴리다 보면 언젠가 맞이할 필사의 운명 앞에 덜한 울상을 지을 수 있지 않을까. 일상적인 일상을 보내고 계신가요? 

마파 사천 뚝배기 - 서울 중구 명동7길 13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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