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전문가의 길
1. 무비랜드 라디오를 들었다. 취향을 꾹꾹 눌러담은 이야기를 만드는 크리에이터들이 고른 영화들이 상영되는 성수동의 작은 영화관. 들을 만한 팟캐스트를 찾아 헤매다, 여기서 팟캐스트도 해? 무심코 들었는데 좋더라. 왜 이 영화를 골랐는지, 어떤 장면이 좋았는지, 구구절절 살을 붙여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언제나 좋다. 보지 않은 영화라 어떤 장면인지 몰라도, 목소리만 들리는 팟캐스트라 어떤 표정으로 말하는지 몰라도, 어쩐지 빤히 보이는 기분이었다.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널고, 청소를 하고, 스트레칭을 하고, 혼자 보내는 조용한 일상에 좋아하는 구구절절을 덧붙이는 일상이 행복했다. 모자람이 없다고 해야 할까. 참 변하지 않네, 여전히 이런 것들이 좋다니.
나이를 먹어도 '요즘 뭐 좋아해요?' 물어보면 버튼을 누른 것처럼 줄줄 읊는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요즘은 잘 모르겠다. 상대가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흥미로워야 되고, 상대가 몰입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진심이어야 하는데. 한결같이 진심인 건 날씨가 아닐까. 얼마 전 동료에게서 '날씨 되게 좋아하시네요'라는 말을 들었다. 몇 년 전에도 '00님은 풍류를 즐기시네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눈이 오는 날, 재빠르게 점심을 김밥으로 해결하고 눈 오는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높은 층의 카페를 가자고 제안했을 때 들었던 말이었다. 환경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어도 여전히, 날씨 좋아하는 사람으로 남는 건 나쁘지 않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맑으면 맑은 대로 즐길 수 있는 풍류가 있다.
2. 맛동산 기행 클럽을 만들었다. 매달 한 가지 음식을 정해서, 각자 동네에서 해당 음식 맛집을 가보고 후기를 남기는 클럽. 릴스를 찍어도 되고, 그림을 그려도 되고, 글을 써도 되고 표현 방식은 자유. 각자의 결과물을 보고 가장 궁금한 맛집을 다 함께 가보는 것으로 운영 방식을 정했다. 첫 주제는 칼국수였는데, 다들 망설임없이 각자의 칼국수 맛집을 골랐다. 문제는 맛집을 고르고 칼국수 먹기까지는 재빠르게 실천했으나, 결과물을 만드는 건 하염없이 늦어졌다는 것. 우연히 동네 뒷골목을 헤매다 오래된 간판에 이끌려 들어간 칼국수집을 소개하고 싶었다. 8,0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 칼국수를 시키면 열무김치와 보리밥 한 숟갈을 내어주는 정. 갈수록 보리밥을 내어주는 칼국수집을 찾기 힘든 시대에서, 어쩐지 보리밥과 열무김치 그리고 참기름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 간결한 맛이 주는 행복. 이미 세 단어로 설명이 끝난 맛이라, 뭐라 더 써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3. 장기하 소극장 콘서트 티켓팅에 실패했다. 서울에서 볼까 하다가, 이름이 멋진 공간에서 열리는 부산 공연을 가자고 했다. 굳이 먼 곳에서 열리는 공연을 찾아가서, 공연도 보고 여행도 하고 싶었다. 어디론가 떠날 핑계와 명분이 소극장 공연이라면 좀 멋지지 않나. 그러나 대차게 실패했다. 실패하고 나서 찾아보니 카페 겸 공연장이더라. 사진 속 오래되고 따뜻한 공연장을 구경하며, 저 자리가 내 자리였어야 하는데... 생각했다. 그 근처에서 학교를 다녔다는 친구에게 뒤풀이할 만한 데 없어? 물었지만 쓸 만한 정보는 얻지 못했다. 실패하고 나니 더 가고 싶어지는 이상한 마음. 그럴 듯한 핑계를 붙여 어딘가로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뭐든지 의미 부여하기 나름이니까.
Ps. 잘 지내셨나요? 무비랜드에서 영화를 본 적 있으시거나, 맛동산 기행 클럽 '칼국수' 편에 자랑하고 싶은 맛집이 있으시다면 답장으로 살짝 자랑해주세요💞
쓰다 보니 칼국수가 먹고 싶어진
망고네 슈퍼 주인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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