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영화 <애프터썬>이 재개봉하고 애프터썬의 뜻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어요. 햇볕에 타기 전 미리 바르는 선크림이 아니라, 햇볕에 탄 피부에 바르는 선크림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의미를 알게 된 시기랑 비슷하게 'sunburn pop'이라는 플레이리스트도 발견하게 되었어요. 평소 좋아하는 sehooninseoul 채널에서 발견한 플레이리스트였는데, 이런 소개글이 덧붙여져 있더라고요. '모래사장과 해수욕과 서핑보드를 위한 재생 목록도 있고, 수영장과 칵테일과 불꽃놀이를 위한 파티 음악도 있지만, 그 모든 찬란함이 끝나고 빨갛게 부어 따끔거리는 피부를 위한 노래들은 없어서 준비해보았습니다.' 이런 틈새공략이라면 사랑할 수밖에 없잖아... 여름 해수욕도 안 갔고 빨갛게 피부가 부어오를 때까지 태양 밑에서 지내지도 않으면서, 이런 단어들에 냅다 반해버린 여름이었어요. 

 왜 애프터썬과 sunburn이라는 말이 와닿았을까. 저는 선크림도 열심히 바르고, 클렌징워터로 1차 세안도 열심히 하는 사람인데요. 그거면 충분하지, 뭐가 더 필요해! 루틴으로 반복되는 일상 이외에, 햇볕이 특별히 뜨거운 날엔 그에 맞는 특별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망각하고 지냈던 것 같아요. 피부도 마음도 햇볕에 잔뜩 노출되었을 땐 애프터썬을 발라줘야 하는 시기가 있는 건데. 그냥 선크림 듬뿍 발랐으니까 괜찮겠지, 하고 넘겼던 게 아닐까. 내 자신에게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진작에 애프터썬을 발라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역시 이런 맥락에서 새로운 단어를 알게 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떤 단어를 새롭게 알게 되면, 그에 따라 관점이 새롭게 열릴 때도 있으니까요. 

 오프닝이 유난히 쓰기 힘들었던 일요일이었어요. 대체로 열심히 살았고, 도저히 잠이 안 와서 늦게 잠든 새벽도 있었고, 편의점 김치전과 맥주 한 캔에 세상을 가진 듯 행복해진 밤도 있었고, 눈 뜨자마자창밖 하늘이 아름다워서 순식간에 행복해진 아침도 있었고, 사람의 마음은 대체로 모르겠다 싶었던 저녁도 있었고, 가을의 맛 무화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 집은 아이스크림 천재가 틀림없다' 감탄한 오후도 있었네요. 소소하게 좋고 소소하게 슬프고 소소하게 지쳤고 소소하게 회복한 한 주였어요. 강력한 한 방이 없으니 오프닝을 쓰기 힘들었던 것 같은데, 어찌저찌 최근 빠졌던 단어에 기대보았어요. 이번 여름 다들 뜨거운 태양 아래서 무사히 살아남으셨는지, 마음도 피부도 빨갛게 부어오르진 않았는지, 안부를 여쭈면서 마무리해볼게요! 

망고네 슈퍼 주인장 드림 

 

 드라마 <더 베어>를 보면서 요리사와 주방에 내적 친밀감이 생긴 요즘, 그렇게 재밌다고 소문난 넷플릭스 <흑백 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을 보기 시작했어요. 저는 콘텐츠를 몰아보는 것보다 아껴보는 걸 택하는 편인데, 시작하자마자 너무 재밌어서 새벽 5시까지 공개된 회차를 정주행했어요. 이미 후기가 차고 넘치는 예능이지만, 최근 이만큼 몰입한 콘텐츠가 없어서 가져왔어요. 사실 서바이벌 예능은 생존과 탈락이 핵심이고, 그 평가 과정이 잔인하다 느껴질 때가 많잖아요. 첫 라운드에서 80명 중 20명만 생존하는 극악의 경쟁을 붙이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참가자의 요리를 존중하고 예의를 지키는 태도가 가장 돋보였어요. 탈락한 이후에도 나는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했고, 내가 구현하려던 맛을 완성했으니 후회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한순간의 요행을 바라는 게 아니라, 연습과 연습을 거친 지나온 시간들이 고스란히 보이는 요리 과정. 한 그릇의 요리를 보았을 뿐인데, 이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가 보이는 결과물.  자기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또 잘하는 사람들을 잔뜩 볼 수 있어서, 이렇게 멋진 사람들의 서사를 구구절절 읊고 싶을 텐데 깔끔담백한 맛으로 풀어내서 좋았어요. 과하지 않은데 이렇게 재밌어, 저랑 흑백요리사 토크하실 분 어디 안 계신가요? 

 "가방에 웬 단추?" 

 그럼 나는 자랑스럽게 답한다. 

 "이 단추는 보통 단추가 아니라고! 나를 상상하게 하는 단추야. 이 단추는 말이지......." 

 내가 막 만든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주 기가 막힌 뻥인데 대부분 사람들이 믿는다. 

 "정말 유서가 깊은 단추구나. 넌 정말 안목이 대단해." 

 나는 그 재미로 물건을 산다. 그러니까 나는 물건을 사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고 설득시키고 그것을 가끔 문학적 자양분으로 쓰고 있다.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변명을 위한 이야기가 문학이 되었다니 재미있지 않은가? 세상에 쓸데없는 물건은 없다고 생각하는 쇼핑 박애주의자인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아직 쇼핑에 인색한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정말로 쓸데없는 물건을 사는 데는 이유가 필요하고 그 이유에는 꼭 맞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 이유는 내가 증명했듯이, 당신의 문학적 재능을 발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슬플 때 티셔츠를 삽니다. 한번 입으로 뱉고 나니 슬로건처럼 되어서, '나는 슬플 때 티셔츠를 사~' 습관처럼 말하고 다녔고 그렇게 여름엔 몇 개의 티셔츠를 모았어요.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새벽에 잠 안 와서 쇼핑한 티셔츠로 잊혔을 텐데, 그 말을 한 덕분에 그 티셔츠들을 볼 때마다 '아, 저거 슬픈 날 샀던 티셔츠였지' 하고 기억하게 되더라고요. 이 글에서는 물건에 아예 새로운 이야기를 붙이는데요. 하나의 단추가 어떤 과정을 거쳐 나에게 온 것인지를 상상해보는데, 설령 사실이든 아니든 그렇게 상상할 수 있게끔 하는 단추라면 이야깃값을 충분히 지불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보통 쓸데없는 물건들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니까요. 제가 산 물건 중 주변에서 가장 질문을 많이 받았던 건 꽃이 달려 있는 작은 니트백이었어요. 제가 손재주가 없는 타입인데도 불구하고, 그 가방을 들고 나갈 때마다 "이거 직접 만든 거야?" 질문을 꼭 받게 되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보이는 것보다 비싸다고 주장하고 싶었지만, 그저 웃으며 "만든 거 아니고 샀어요"라고 대답하곤 했는데요. 가을에 그 니트백을 다시 개시하고 같은 질문을 받게 된다면, 이번엔 상상을 덧붙인 이야기로 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최근에 구매한 물건은 무엇인지, 그 물건은 어디에서 온 건지 같이 상상해보실래요? 

젠제로 압구정 - 서울 강남구 언주로167길 46 1층

아이스크림 천재라는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는, 비싼 만큼 맛있는 압구정역 근처의 젤라또집. 감태카라멜, 산양유 요거트 등 특색 있는 메뉴들, 시즌별로 나오는 선데 메뉴들, 어느 메뉴를 먹어도 실패가 없는 곳. 가을 시즌 무화과 선데는 특히 꼭 먹어볼 것. 

캑터스 커리 클럽 - 서울 용산구 회나무로 9 1층

가게 곳곳에 위치한 귀여운 선인장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녹사평역 근처의 카레집. 키마 카레, 소고기 카레, 새우 카레 등 정직한 카레 메뉴들을 맛볼 수 있고, 가게 이름만큼이나 귀엽게 나오는 한상 차림에 혼밥하기도 좋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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