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산에 다녀왔습니다. 딱 24시간 정도를 부산에 있었는데요. 춥고 메마른 서울을 떠나서, 기온 급강하로 인해 감속 운행 이슈로 30분 지연된 KTX를 타고 도착한 부산은 훨씬 따뜻했어요. 여전히 춥긴 했지만요. 겨울의 해운대는 참 오랜만에 갔는데, 바다가 보이자마자 참 좋더라고요. 늘 바다가 있는 도시로 도망칠 때면 조금씩 생각해봐요. 덜 춥고 바다가 바로 옆에 있는 동네에 살면 조금은 더 행복할까. 기분 내킬 때마다 바다로 도망치는 기분은 어떨까. 건물들 사이로 빼꼼 보이기 시작하다가 금방 탁 트인 바다가 펼쳐지는 그 순간을 가장 좋아합니다. 그런 순간을 더 아름답게 조명하고 싶어서 선곡을 미리미리 준비해놓는 편인데요. 언제 바다가 나올지 몰라서 무방비 상태로 창밖을 보다가, 우연하게 흘러나오고 있던 노래들이 잘 맞아떨어질 때도 종종 있습니다. 이번 첫 바다의 순간엔 정우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을 듣고 있었어요. 아주아주 그 풍경과 잘 어울리는 노래라 생각했고 오래오래 바다를 봤습니다. 친구는 택시 타고 먼저 떠나고, 일부러 두 정거장 거리를 바다를 따라 걸어갔던 시간이 오래 남을 것 같아요. 

 2. 친절함으로 인해 괴로운 날들을 종종 보냈습니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던데, 아무리 나눠가져도 끝이 나지 않는 일의 홍수 속에서 2주 정도를 보냈는데요. 뭐 하나 제대로 해낼 수 없는 환경인 것 같아서 괴로운데, 일도 많고 친절도 많은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어떻게든 끝이 났습니다. 곁에서 도와주는 친절한 마음만 날름 받아먹고 나만 살자는 마음으로 지냈으면 덜 괴로웠을 텐데, 그렇게 모른 체하고 날름 받아먹는 것도 참 쉽지 않더라고요. 마음껏 미워할 상대가 있었으면 더 편했으려나! 그런 마음을 품고 퇴근하는데, 심지어 택시 기사님까지 친절하셨어요. 맨날 이런 시간에 퇴근하냐, 사람 잡는 것 같다며 걱정 한마디를 얹는 택시 기사님 덕분에 갑자기 울고 싶어졌지만, 정신없는 SNS 피드를 끝없이 내리며 끊임없이 다른 생각을 하며 집에 가려고 애썼습니다. 새벽부터 출근한 날엔 이뮨 비타민과 포도당 캔디를 주섬주섬 챙겨오는 사람들. 나는 빈 주머니로 출근했는데, 다들 어디서 그렇게 귀엽고 다정한 주머니를 챙겨온 건지! 친절을 거부하겠어! 농담 삼아 말했지만, 그 친절이 있어 버틸 수 있었는지도 몰라요.

 3. 재밌는 TMI들이 많아서 '헛소리 및 TMI 전용 계정'을 따로 만들어야겠다 싶었던 주간이었는데요. 안 적어놨더니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메모장을 들췄더니 얼마 전 영화 <쇼잉 업> 씨네토크를 들으며 막 적었던 내용이 있더라고요. '삶의 예각을 열어둔다면 언제 삶이 변할지도 모른다'. 삶의 예각이라는 표현이 참 좋았어요. 누구한테 말하기엔 너무 사소하지만 나한테는 재미있는 삶의 디테일을 기록해두고 싶은 마음도 거기서 비롯된 거겠죠. 저는 늘 작은 디테일이 삶을 바꾼다고 믿는 사람인 것 같아요. 사실 삶을 바꾼다는 표현은 거창하고, 그 작은 디테일이 계속할 수 있는 힘과 재미를 준다고 믿는 쪽이랄까. 얼마 전엔 제가 보낸 오프닝 사진을 보고 궁금해해주신 분이 계셨고, 이렇게 작은 부분도 세심하게 봐주신 분이 계시다는 사실에 너무너무 기뻤어요. 앞으로는 그래서 사진에도 짧은 한 줄씩 덧붙여보려고 해요. 이제 다음주부터는 추위가 좀 가신다던데, 다들 마음 속의 추위도 좀 덜해지는 한 주가 되시길! 

망고네 슈퍼 주인장 드림 

 

 '소주가 아니라, 와인이 잘 어울리는 감자탕'을 만들어주세요. 세상에,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주문서로 요리를 만들어주는 식당이 있습니다. 넷플릭스에서 선보이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주관식 요리를 만드는 요리 토크쇼 '주관식당'인데요. 최강록 x 문상훈 조합에 첫 게스트로 장기하가 나온다? 이렇게 제 최애들만 모아놓으시면 안 볼 수가 없잖아요... 후기도 찾아보지 않고 그냥 토요일 저녁에 공개되자마자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시청했습니다. 사실 조합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자극적인 소재와는 거리가 먼 슴슴한 맛이고, 토크보다 요리 쪽에 집중한 편이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왜 이런 요리를 만들게 되었는지, 재료와 소스 선정도 하나하나 섬세하게 이유를 담아 만드는 과정을 차분하게 보여줘서 좋더라고요. 신선한 주문 의뢰서를 넣는 게스트, 뻔한 요리를 하지 않고 재료 본연의 맛에 진심인 셰프. '10시 1분의 국물 맛과 10시 3분의 국물 맛이 다르니 그때의 맛을 잘 기억하라'고 하는 식당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나요. 허겁지겁 끼니를 때우기 위해 먹는 밥에 지쳤다면, 일주일에 한 끼 정도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밥을 먹고 싶다면, 그때 딱 보기 좋은 밥 친구로 추천할게요💞

 '에일리언'이라고는 키린지의 노래밖에 모르는 저와 <에이리언> 모든 시리즈를 좋아하는 당신. 당신이 무얼 그리 좋아했었는지 궁금해서 영화 <에이리언>을 봤습니다. 1987년에 만들어졌다는 이 작품이 상상한 미래는 지금보다 전반적인 디자인이 더 훌륭한 것 같습니다. 탐사선 승무원이 슈퍼컴퓨터와 채팅하는 반짝거리는 그 공간을 보면서는 영화미술에 약간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그 공간을 둘러보면서 왜 그런지 당신 생각을 했습니다. 당신은 분명 이곳에 다녀갔습니다. 자주 본 영화였을 테니 어쩌면 이 컨트롤 룸에는 한두번이 아니고 꽤 많이 다녀갔겠지요. 그 생각을 하면 조용하고 편안한 기분이 듭니다. 

 당신은 왜 이렇게 영화를 많이 보셨을까요? 어떤 영화가 재미있었고 어떤 건 별로였다는데 저는 거의 본 적이 없는 것들이라서 영화제목을 몰래 기록해두었어요. 아마 제가 보는 속도로 이 리스트의 영화를 모두 보려면 한참은 걸릴 것 같아요. 이상하지요. 아직 보지 않은 영화가 이렇게나 많다는 것이 위로가 된다니. 어떤 장면에서 멈칫했을지, 어떤 장소를 좋아했을지 상상해보며 이제 당신이 먼저 다녀간 장소들을 따라다녀보려고 합니다. 저는 그냥, 당신과 같이 있고 싶으니까요. 

 언젠가 소개팅 애프터로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요. 영화는 재미없었어서 제목도 생각이 안 나는데,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어요. 영화 시작 전, 예고편에 에단 호크가 나오길래 지나가는 말로 좋아하는 배우라고 했거든요. 비포 시리즈도 너무 좋아한다고. 그 다음날 그 사람이 비포 시리즈 봤는데 너무 좋다고 연락이 와서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꼭 보세요!' 추천해도 그냥 흘리기 십상인 세상에, 지나가는 말을 기억하고 바로 그 다음날 실천에 옮긴 게 좋았던 걸까요. 잘 되진 않았지만 오래 남는 소개팅 에피소드가 되었어요. 이 글도 그런 맥락에서 처음 읽자마자 반해버렸는데요. 그 영화가 좋은지 싫은지 내 취향인지 아닌지 다 상관없이, 당신이 어떤 장면에서 멈칫하고 어떤 장소를 좋아했을지 상상하고 싶어서 영화를 보는 일. 물리적으로 같이 있지 않더라도, 그렇게 영화를 통해서 당신과 같이 있다고 상상하는 일. 그런 마음으로 영화를 본 적이 있었나?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결국 취향이 조금씩은 닮아가잖아요. 그건 나도 몰랐던 새로운 취향 발견의 영역일 수도 있겠지만, 그 취향을 그런 이유로 좋아하는 당신의 모습이 좋아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글의 전문이 더 좋으니까 꼭 시간이 되시면 다 읽어보시는 것도 추천드려요❄️

서촌누각 - 서울 성북구 혜화로 88 1층 일부호 서촌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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