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예종 영상원 30주년 기획전을 다녀왔습니다. 4월에는 사랑을 말할 것, 5월에는 오래오래 웃어볼 것, 6월에는 유연하게 바라볼 것, 7월에는 처음을 떠올려볼 것, 8월에는 편지를 써볼 것. 귀여운 라임을 맞춘 월별 테마로 30주년을 기념해서 30개의 단편을 상영하는 기획전인데요. 저는 한예종과 일절 관계없는 사람이지만, 평소 좋아하던 장면이 삽입된 단편을 상영한다길래 당장 달려가서 봤어요. 보는 내내 너무너무 좋았고, 끝나고 감독님과의 GV 시간도 있었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영화 <겹겹이 여름>을 연출하신 백시원 감독님이셨는데, 감독님의 본업은 다큐를 제작하는 일을 하신대요. 다큐는 통제하지 않고 늘 관찰자의 시점으로 찍지만, 영화는 어느 정도 통제와 계획 안에서 찍게 되는데 그래도 꼭 영화가 다큐 같은 순간들이 있다고. 내가 썼던 대사들을 넘어서서 놀라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고. 그 말이 참 좋았습니다.

 저는 사는 게 어이없고 힘들 때면 시트콤의 관점에서 종종 생각하는데, 사는 게 우연히 아름다울 때면 다큐멘터리의 관점으로 바라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100일 촬영하면 하루 정도 '악!' 소리 지르고 싶을 정도로 좋은 장면을 건지게 된다고 하셨는데, 아마 사는 것도 좀 비슷하지 않나 싶어요. 살다 보면 정말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장면을 건지게 될 때가 있으니까. 그런 영화와 GV를 보고 '아, 역시 좋아하는 걸 하면 이렇게 마음이 가득차는구나' 생각했는데 끝나고 온 연락을 확인하니 회사에서 문제가 발생했더라고요. 당장 해결해야 하는 일은 아니어서 급한 건 아니었지만, 바로 화가 치솟는 경험을 하고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어요. 역시 배고파서 더 짜증나는 거라고 대충 얼버무리고, 수육에 소주를 먹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집에 왔습니다. 날씨가 너무 좋았고, 비가 오기 직전 벚꽃의 마지막을 볼 수 있었고, 재미없는 극 영화의 한 커트 같은 하루였습니다. 보는 사람은 별 감흥 없는데, 만든 사람만 애틋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장면 같은 하루. 

 지난번에 보냈던 편지엔 이런 답이 왔어요. '어떻게 매일 새롭겠어요. 지겨운 날들이 태반일 테지요. 그 태반인 하루를 나눠주셔서 감사해요'라는 따뜻한 답장 덕분에 가끔은 지겨운 이야기를 꺼내도 되겠구나, 하는 위로를 받았어요. 사실 최근에 저는 일기 클럽에 가입했는데요. 매일 일기를 써서 온라인으로 공유하는 모임인데, 매일 일기 쓰는 건 역시 현대인에게 어려운 과제인 것 같아요. 늘 일주일 치 일기를 밀려서 몰아서 적고 있는데, 어떤 날은 줄줄 할 말이 많고 어떤 날은 정말 '회사 가서 바빴고 피곤하고 일하기 싫고...' 이런 말들을 빼고 나면 뭘 적어야 하지 싶은 날들도 있더라고요. 그래도 요즘은 스몰토크로 '날씨가 너무 좋네요' 하기 좋은 계절이잖아요. 짧게 지나가는 하루의 농담들을 곱씹으며 지내는 요즘입니다. 저는 오래오래 농담할 줄 아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농담해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농담해야 더 좋아할 수 있으니까. 갈수록 농담에 재능이 없어지는 것 같아서 슬픈데, 이건 뭐 연습하면 더 어색해지는 일이니까요. 농담할 수 있는 여유와 관계를 되찾으면 금방 회복될 텐데.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은 다정한 농담과 웃음이 매일 스치는 한 주 되시길🌿

망고네 슈퍼 주인장 드림 

 

 오프닝에서 소개했던 기획전을 갔던 이유는 바로 이 작품을 보기 위해서였어요. 지금은 조현철 배우를 정말 좋아하지만, 그의 이름도 얼굴도 모르던 시절에 우연히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접했던 적이 있어요. 보자마자 너무너무 좋아서, 이게 내가 늘 바라던 정직한 노래의 정석이네, 마음에 담아뒀는데요. 어디서 나온 장면인지도 모르고 지나갔는데,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이 장면을 다시 만났어요. 그제서야 조현철, 임지연 배우가 나왔다는 걸 알게 됐고 그렇게 검색을 통해 영화 [9월이 지나면]에 삽입된 장면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오로지 그 장면을 극장에서 보고 싶어서 달려갔습니다. 대학 건축학과를 배경으로, 공모전을 앞두고 갑자기 설계도가 사라진 상황을 그리는 내용도 재밌었는데요. 도난 사건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사랑 이야기로 흘러가는데, 그 멜로를 그리는 배우들의 얼굴, 멜로를 형성하는 계기가 된 그린데이의 음악과 이와이 슌지의 영화. 그 소재들이 너무 좋아서 보는 내내 '진짜 오길 잘했다'라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저는 앞으로도 오래오래 이 영화 속 '9월이 지나면 깨워주세요'를 부르던 장면을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4월 말에 열리는 마리끌레르 영화제에서 '9월이 지나면 & 너와 나'를 묶어서 하는 GV도 있더라고요. 이미 GV는 매진이긴 하지만, 혹시 보러 가시는 분들이 있다면 얼마나 좋았는지 알려주세요🌻

 이게 뭐 하는 짓이냐ˑˑˑˑˑˑ. 자괴감이 밀려오지만 뇌는 뇌고 손은 멈출 수가 없다. 이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선화에게 연락하지 않고 밤을 보내는 방도를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선화에게 절대 연락하지 않으려고 선화를 찾는 것이다. 이상하지만 그게 그렇다. 나는 어쩌면 이 시간을 참기 위해, 차마 내 손가락을 분지를 순 없으니까 저주를 읊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선화 너도 울어라. 나랑 똑같이 실은 3년 몇 개월을 옆에 누워 배를 쓸어 주고 손을 눌러 마사지해 주던 내가 없다는 사실에 허전해서 밤새 휴대폰만 들여다보다가 지각해라. 맡은 프로젝트 대충 해서 회사에서 혼나라. 커뮤니티에 생각 없이 쓴 글에 악플 달려서 하루 종일 언짢아라. 지하철에서 모르는 손한테 등 밀려라. 집에 돌아와서 그런 자잘한 걸 같이 욕할 내가 없다는 사실에 서러워서 울어라. 집에서 혼자 심심해서 소주 마시다가 취해서 안 친한 사람한테 전화 걸어서 망신당해라. 그렇게 이 여자 저 여자한테 전화하다가 좋아하던 여자한테 걸려서 걔한테도 차여라. 그러다가 나한테까지 전화를 하게 되면ˑˑˑˑˑˑ 받아 줄게. 봐줄게. 미안하다고 하면 알았다고 할게. 

 

 헤어지고 저주를 하더라도 이렇게 성의 있게 저주하면 어쩐지 귀여워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구구절절 저주했는데 사실 들여다 보면 심각하게 해를 끼치는 내용은 하나도 없고, 다 별거 아닌 하찮은 저주의 내용으로 가득차 있기도 하고요. 결국은 저주라는 틀을 씌우긴 했지만, 내가 없다는 사실이 서러웠으면 좋겠고 내가 없다는 사실이 허전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티가 팍팍 나는 저주. 마지막엔 받아줄게, 봐줄게, 미안하다고 하면 알았다고 할게, 너무 한번에 지고 마는 이런 이야기를 저주라고 할 수 있나? 퍽이나 이 저주가 효력이 있겠다, 싶을 정도로 하찮은 저주. 이 글을 읽으면서 사람들에게 공감도 얻어내고 웃음도 얻어내는 디테일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나는 걔랑 헤어졌고 그 애에게 연락하지 않기 위해서 그 애를 저주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간단한 상황인데, 이렇게 구구절절 디테일을 살리면 살아숨쉬는 이야기가 되잖아요. 조금은 어이없고 조금은 귀엽고 조금은 웃긴 디테일들을 아주아주 좋아하는데, 이 글이 딱 그 조건에 부합하는 글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결국은 제대로 저주하지도 못하면서, 괜히 '저주'라는 거창한 프레임을 씌워서 누군가를 미워하기 위해 노력해본 적이 있나요?

저저 - 서울 중구 퇴계로41길 31 . 1층 101호

위의 버튼을 클릭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