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_별 일 없이 산다 별다른 걱정 없다

2025. 6. 1.

별 일 없이 산다

1. 별 일 없이 살고 있습니다. 세상엔 별 일이 참 많고, 별 일 없이 사는 게 얼마나 귀한지 이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마 장기하님이 '별 일 없이 산다'라는 노래를 냈을 때도 그게 얼마나 귀한 순간인지 알았기 때문에 쓰지 않았을까. 누군가를 크게 미워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대단히 바쁘지도 널널하지도 않게 일하면서, 대단히 이르지도 늦지도 않게 잠들고, 끼니를 다 잘 챙겨먹지만 대단히 맛있는 걸 먹지는 않는 날들. 이 적당함의 균형은 정말 쉽게 깨지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저 혼자만 알고 지내고 있어요. '나 요즘 별 일 없이 지내' 이렇게. 저에겐 이렇게 '별 일 없이 산다' 기간이 반 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것 같은데, 어떤 주기로 평온의 시기가 찾아오는지 궁금합니다.

2.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의 촬영지를 갔습니다. 드라마 속에서 밀면집으로 둔갑했던 쌀국수집을 갔었고, 바다가 잘 보이는 찻집을 갔었는데요. 이 두 번의 방문은 계획하고 간 거였다면, 이번엔 발길 닿는 대로 가다가 우연히 방문했어요. <박하경 여행기> 서울 편에는 국립기상박물관이 나오는데요. 친구랑 통화하면서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가, 경희궁까지 흘러흘러 걸어갔는데요. 걷다 보니 국립기상박물관 푯말이 보이더라고요. 지금 이 시간이라면 박물관 문은 닫았겠지만, 그래도 촬영지를 가봐야겠다! 푯말을 따라서 걷고 오르막길을 오르고 또 올랐어요. 7시 무렵이라 역시나 박물관은 문을 닫았더라고요. 건물 뒷편만 요리조리 구경하다 나왔습니다. 슬렁슬렁 담을 넘는 고양이와 눈이 마주치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오래오래 바라보고, 지는 해가 비친 유리창도 조금 바라봤어요. 너무너무 좋아서 다음엔 꼭 정문으로 들어가봐야지, 그리고 다른 촬영지도 놀러가봐야겠다.

3. <박하경 여행기>를 쫓아다니다 보니 핸드폰 배터리가 5프로 정도 남았더라고요. 이대로 집에 가기엔 기분이 너무 좋은데! 급한 대로 보조배터리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편의점을 찾아다녔습니다. 편의점엔 저렴한 보조배터리는 다 품절이거나, 아예 보조배터리를 팔지 않거나 하더라고요. 3퍼센트 남은 핸드폰의 지도 맵을 켜서 근처 편의점을 찾아다녔습니다. 편의점을 따라 걷다 보니 서대문역이 나오더라고요. 맛집 투어도 아니고, 이렇게 편의점 투어를 하다 보니 또 새로운 골목길로 걷게 되는구나. 생각보다 재밌는 투어 방식이다, 편의점 한 5군데를 돌아다니며 짧은 자기합리화를 해봤습니다. 결국엔 큰 편의점에서 적당한 가격대의 보조배터리를 찾았고, 핸드폰을 무사히 충전할 수 있었는데요. 편의점 투어를 다니다 보니 배고프고 지쳐서 밥만 대충 먹고 결국 집에 가긴 했습니다. 늘 계획대로 되진 않지만 그래서 재밌는 날들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계획이 틀어져도 즐거워할 수 있는 여유가 함께하는 한 주가 되시기를🌻

두릅이 먹고 싶은

망고네 슈퍼 주인장 드림

느끼고소 치즈퐁듀 한 입🌻

Apple TV+ <더 스튜디오>

살면서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적은 없는데, 엔딩크레딧에 이름을 올리는 일을 종종 꿈꿨던 것 같아요. 영화나 드라마 옆에서 일하고 싶었던 분들이라면, 혹은 영화 그 자체를 사랑하는 분들이라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드라마 <더 스튜디오>를 가져왔습니다. 드라마 <더 스튜디오>는 영화 스튜디오 신임 대표가 된 주인공이 등장하는데요. 영화제에서 상 받고 평론가들에게도 극찬을 받으면서 상업적으로도 성공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고, 셀럽들과의 관계도 잘 유지하면서 인정받고 싶지만 제작비를 줄여서 회사 경영에도 힘써야 하고, 모순적인 문제에 직면한 주인공은 끊임없이 사고를 치고 엉망진창으로 상황이 흘러가요. 수많은 문제를 결정해야 하는 스튜디오 대표 자리에 있는데, 하필 주인공은 회피형(?) 성향이 있어서 문제가 점점 더 커지기만 합니다. 일단 정말 재밌고 잘 만든 코미디인데, 마틴 스코세이지, 잭 에프론, 론 하워드 등 화려한 배우와 감독들이 카메오로 등장하는 걸 보는 재미도 쏠쏠해요. 무엇보다 어이없게 웃으면서 시리즈를 보다 보면, 영화를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종종 미워하고 싫고 지긋지긋할 때도 있지만, 결국엔 너무너무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일단 재밌으니까 여름에 한 편씩 보기 딱 좋아요🌻

신선한 가지파스타 한 입🌿

Q. 처음으로도 돌아가볼까요? 대니가 자살하려고 산 제품을 환불하러 갔다가 환불을 못 하는 장면. 감독님도 작은 일이 인생의 갈래를 바꾼 경험 있어요?

= 저도 대니와 같은 이유로 산 일산화탄소 감지기를 환불하러 간 경험이 있거든요. 근데 너무 창피해서 반만 환불하고 결국 제품 하나는 그냥 사서 차고에 처박아뒀어요. 쇼의 제작 디자이너가 대니 집에 어떤 감지기를 둘지 상의했을 때, 차고에서 그걸 꺼내다 사진을 찍어서 보냈죠. <성난 사람들>에 나오는 일산화탄소 감지기는 실제로 제가 환불하지 못한 그 제품이에요.

Q. 대니가 환각 속에서 했던 말을 마지막 질문으로 묻고 싶어요. "행복해지는 게 왜 이렇게 어렵지?"

= 아마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거울을 보면 결국 내 모습밖에 안 보이니까요. 자기 자신만 바라보면 계속 부족한 부분만 보이죠. 근데 누군가를 위해 뭔가 하려고 하면, 행복이 자연스럽게 따라와요.

-[GQ] 이성진 "부끄럽고 어두운 감정을 마주해야만 변화가 와요"

저는 요즘도 누군가에게 간단한 포스트잇을 남길 때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종종 써요. 어느 순간부터 '행복하지 않음'의 상태가 디폴트라고 생각하는데요. 행복한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별 일 없고 살 만하다는 기분이 들 때가 최선의 상태가 아닐까. 오히려 행복한 게 디폴트라면, 행복하지 않은 순간이 너무 괴롭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찰나로 스쳐가는 행복이 얼마나 좋은 건지도 잘 모르지 않을까. 행복하지 않은 디폴트 상태를 잘 받아들이고 살고 있지만, 그래도 가끔은 '행복해지는 게 왜 이렇게 어렵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화나는 일은 이렇게 쉽게 생기는데, 행복할 일은 아등바등 노력하지 않으면 잘 안 생기는 것 같고. 자주 분노하는 현대인이라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드라마 <성난 사람들> 이성진 감독님의 인터뷰를 가져왔는데요. 전문이 너무 좋아서 일부만 같이 읽으려고 가져왔어요. 모든 이야기는 허구지만, 진짜에서 비롯된 이야기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가끔 인상깊었던 장면들이 실제 경험에 기반했다는 걸 알게 되면 직접 겪은 디테일은 역시 다른 건가 싶을 때도 있어요. 시간이 되신다면 전문을 읽어보시는 것도 추천드려요!

부드러운 명란달걀말이 한 입🌼

KIRINJI- Aliens

아무것도 모르는 언어의 노래를 듣는 건 재미있어요. 최근 KIRINJI의 노래를 들으면서 종종 생각했습니다. 이건 도대체 뭘 말하는 노래일까? 가장 처음 궁금했던 노래는 Crazy Summer였는데요. 제목만 들으면 엄청 강렬한 노래일 것 같은데, 막상 노래를 들으면 해가 뉘엿뉘엿 지는 여름밤이 떠올라요. 가장 뜨거운 시기는 지나간, 그러나 여전히 끈적끈적한 기운이 남은 여름밤. 이런 노래에 왜 'Crazy Summer'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어떤 여름을 상상했길래 이런 노래가 나온 걸까. 궁금해서 가사를 찾아봤는데 '여름의 끝에서 난폭하게도 사랑했던' 이야기가 담겼더라고요. 저는 쨍하고 선명한 여름이 좋은데, 이렇게 뉘엿뉘엿 지는 여름도 있구나. 그런 맥락에서도 또 흥미로웠던 곡 Aliens를 가져왔습니다. 이 노래도 대낮보다는 열대야에 시달리는 새벽에 들어야 될 것 같은 노래인데요. 어쩐지 슬프고 쓸쓸한 노래라고 생각했는데, 가사를 찾아보니 '당신을 좋아해 에일리언'이라고 말하는 귀여운 상상력이 한 스푼 담긴 노래더라고요. 어디론가 밀려난 두 사람이 낭떠러지에서 나누는 고백 같기도 하고. 이 노래의 공연 영상 댓글을 보면 각자 이 노래를 들으며 했던 상상, 이 노래와 관련된 추억들을 나누고 있어서 참 다정합니다. 좋은 노래는 좋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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