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다가 깬 일요일 오후입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방 안에서 낮잠을 푹 자고 일어났을 때의 개운함을 좋아하지만, 밖의 시끄러운 소리에 애매하게 자다 깨면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습니다. 낮잠을 푹 잘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주말 이틀뿐인데, 그것도 마음대로 못 하나! 이렇게 사소한 일에 억울한 마음이 드는 내 자신이 웃겨서, 창문을 열고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책상 앞에 앉았는데요. 딱 견딜 수 있을 정도로만 더운 요즘이 좋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헐렁한 반팔티와 냉장고바지, 헐렁한 슬리퍼를 끌고 나가기 딱 좋은 계절. 이 계절은 또 금방 지나가고 견딜 수 없는 더위의 계절이 찾아오겠지만요. 

 분명 좋은 순간들이 있다. 진짜 아름답고 좋고 행복하고 이 기억으로 나는 또 버티겠지! 미래의 나는 분명 이 순간을 그리워하겠지! 확신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의 강도가 다르다. 단순히 '좋음'과 '사랑'의 차이인가. 좋다고 말하는 순간들은 찰나지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들은 그래도 오래오래 남는 건가. 오래오래 남아서 곱씹게 되고 그 영향력이 강력하려면 '사랑'을 붙일 수 있는 순간들이어야 하는 건가. 요즘의 좋은 순간들이 너무 찰나라고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이 그것들이 사랑의 순간들이 아니어서 그런 걸까.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너무나 보고 싶었지만, 179분이라는 상영 시간을 도저히 견딜 자신이 없어서 영화 관람을 포기했던 적이 있는데요.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이 개봉했다고 해서, 궁금한 마음 반 설레는 마음 반 품고 보게 된 영화를 가져왔습니다. 영화 <우연과 상상>은 '우연'에서 시작된 사건들을 상상한 3개의 단편 모음집입니다. 집에 가는 택시 안에서 친구의 연애 상담을 들어주고, 수상의 영예를 안은 교수님을 찾아가 소설에 대해 질문하고, 오랜만에 길을 가다 고등학교 동창을 재회하고. 너무나 일상적인 상황에서 출발한 이야기들은, '우연'을 거쳐 마법처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야, 그게 말이 되냐. 너무 개연성이 없어. 뜬금없잖아." 하면서 욕을 먹는 영화/드라마들이 많은데, 살다 보면 별의별 일들이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오잖아요. 영화 <우연과 상상>은 극적인 우연이 발생하지 않아도, 그 별거 아닌 우연으로 드라마틱해지는 삶을 그려낸 영화라고 느껴졌어요. 대화에 몰입하게 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적극 추천합니다💗

  한가지 고백하자면 나는 아주 오랫동안 슈퍼에서 파는 플라스틱 통 안의 꿀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병에 든 '그' 꿀, 사실은 그렇게까지 맛이 크게 차이 나지도 않는, 아주 미세한 감각의 차이로만 구별될 뿐인 그런 꿀에 매혹되는 인간일까 하는 생각에 고통스러울 때가 많았다. 어째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죄다 하찮고 세상의 눈으로 보면 쓸모없는 것들뿐인 걸까. 하지만 이제 나는 쓸모없는 것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촘촘한 결로 세분되는 행복의 감각들을 기억하며 살고 싶다. 결국 그런 것들이 우리를 살게 할 것이므로. 

 '나는 그냥 쓸데없고 아름다운 걸 만들고 싶어.' 요즘 가장 자주 했던 생각 중 하나입니다. 누군가 공감하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누군가가 봤을 때 대단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걸 바라지도 않고. '이런 걸 도대체 왜 하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건 아닌데, 그냥 봤을 때 찰나의 좋음을 느낄 수 있는 것들. '그래서 그게 뭔데?' 물으면 사실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랜만에 글도 쓰고, 사진도 찍고, 아름다움을 찾아 전시도 보러가고, 영화도 보러가고. 뭔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만으로도 사람이 더 생생해질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한 요즘이었습니다. '행복이 뭐 별거냐.' 싶은 구체적인 행복의 감각들을 기록하면서 지내다 보면, 쓸데없고 아름다운 것을 만들겠다는 꿈에 조금은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요. 각자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마음껏 사랑하는 한 주를 보내시기를 응원합니다! 

 눈 닿는 곳마다 초록빛으로 물든 게 아름다워서, 길거리 사진을 유난히 많이 찍었던 날. 버스 타고 돌아오는 길에 새로 발매된 잔나비 소곡집을 들었어요. 앨범 제목이 '초록을거머쥔우리는'이라니,  그날 본 풍경과 더없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앨범 전체를 내내 반복재생하며 돌아왔지만, 가장 마음에 닿았던 노래를 가져왔어요. '봄이 지나고 꽃이 지고 그것이 숙명이라면 나는 봄이 모든 여정의 마지막이길 바래요. 꽃 한 바탕 피우고 박수 한번 받고 그렇게 막이 내리는거.' 곡 소개를 읽고 흔히 말하는 '봄 여름 가을 겨울'에서 이런 이야기가 피어날 수 있구나, 싶더라고요. 여정의 끝은 황량한 겨울처럼 바닥을 보고 끝난다거나, 기대했던 것처럼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 못해서 씁쓸하게 끝날 때가 많았던 것 같은데. 그래도 어떤 여정은 아름다운 봄처럼 막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노래였어요. 사실 아무 생각 없이 푸르른 풍경을 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앨범입니다. 푸르른 계절이 가기 전에 많이 듣는 걸 추천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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