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공부하기 싫을 때면 기어다니고 싶다고 생각하던 학생이었는데요. 새해의 퇴근길, 문득 이런 생각을 했어요. 아, 그냥 뒹굴뒹굴 굴러가고 싶다. 기어다니나 굴러다니나 거기서 거기인 상상을 하는 사람이 된 게 우습더라고요. 그때나 지금이나 진짜로 기어다닐 수도, 굴러다닐 수도 없으니 어떻게든 할 일을 해야 하는 것도 똑같고요. 절전 모드의 배터리처럼 살지만, 그래도 아직 배터리가 남아있으니 안 되는 기능은 없는 핸드폰 같달까요. (실제 지금 제 핸드폰도 13%가 남아있네요.) 퇴근길엔 뭐 먹을까? 야식 고민을 하는 게 작은 낙인데, 굴러다니고 싶은 기분이 드는 날엔 뭘 먹고 싶은 마음도 안 들더라고요. 내 자신에게 뭘 해주면 새해의 기분을 낼 수 있을까. 잘 모르겠어서 일단 이불 속에서 구운 피스타치오를 까먹었습니다. 

 2024년의 문장을 고르자면, '그래도 어떡해 해야지'를 고를 수 있지 않을까요. 새해엔 좋은 말만 하고 싶은데, 새해엔 지긋지긋한 일들만 생기더라고요. 오랜만에 꿈도 회사 꿈을 꿨습니다. 회사 꿈을 꾸다 깼는데, 다시 잠들었더니 회사 사람이 나도 회사 꿈을 꿨다! 이야기해주는 꿈이었어요. 꿈속에서 동료랑 스몰토크도 하고 상사랑 면담도 하고 예전 회사 동료랑 같이 일도 하고 바쁘다 바빠.. 잠에서 깨서 생각했어요. 요즘 사는 게 쉽지 않구나? 그래도 꿈에서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은 걸 보면, 지긋지긋하긴 하지만 일상적인 일들만 생긴 걸 보면, 어떻게든 지겨운 시기를 버티고 지나가겠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 살 더 먹고 나이가 든다는 건 이런 장점이 있는 것 같아요. 쉽지 않은 시기를 버틸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것. '내가 할 수 있을까?'의 물음표가 '어떻게든 해야지.'의 마침표로 바뀐 것. 

 많은 일이 있었고 마냥 기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없었던 새해였습니다. 새해가 되면 늘 한 해의 스크린샷을 뒤져서 좋아했던 문장을 빌려서 인사를 전하는데요. 올해는 일드 <오오마메다 토와코와 3명의 전남편>에 나오는 대사를 빌렸습니다. 좋아한다는 마음을 전하는 전남편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데요. "건강했으면 좋겠어. 잘 잤으면 좋겠어. 채소도 먹으면 좋겠고." 이 말을 들은 전남편은 좋아한다는 말을 했는데 채소 먹으라는 대답이 돌아올지 몰랐다고 답하지만요. 새해엔 맨날 햄버거, 피자 먹지 말고 채소도 좀 먹고, 제 시간에 잘 잤으면 좋겠고, 건강했으면 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요. 새해맞이 새로운 계획도 다짐도 많이 세우셨겠지만, 무엇보다 잘 자고 잘 먹고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새해엔 잘 자라는 말도, 밥 먹었어?라는 말도, 진심을 담아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네요. 이번 주엔 2024 연말결산으로 한 해 동안 저를 즐겁게 한 것들을 적어봤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세요! 

 23년의 행복 루틴으로 팟캐스트 <김혜리의 필름클럽>을 들으며 설거지를 하는 일상을 적었더라고요. 24년에도 변함없이 필름클럽을 들으며 설거지를 하며 지냅니다. 최근 필름클럽 8주년 생일 모임 에피소드를 들으면서, 실제 필름클럽 생일(시작일)과 제 생일이 똑같다는 사실도 알게 됐어요. 여전히 좋아하는 걸 좋아하지만, 24년에 새롭게 좋아하게 된 건 시를 읽는 순간이에요. 여름에 충동적으로 시를 읽고 쓰는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서점에 가면 종종 시집 코너에 들러 시집을 들춰보고 시집을 사고 엽서에 시를 필사하기 시작했어요. 매주 수요일마다 한 편의 시를 추천해주는 '우리는 시를 사랑해' 뉴스레터를 원래 구독하긴 했지만, 사실 시보다 편지 파트를 더 열심히 읽는 사람이었거든요. 요즘은 어떤 시를 추천해줄까,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이런 시를 이런 마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상상하며 읽게 됩니다.

 재밌는 단어 수집과 상상을 좋아하고, 동시에 아름다운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시가 매력적이지 않을 이유가 없구나. 왜 그동안 어렵다고 생각하고 안 읽었을까! 가끔 할 일 없는 오후면 카페에 가서 작은 엽서에 하고 싶은 말들을 쓰고, 하고 싶은 말들이 떠오르지 않을 때면 좋아하는 시를 옮겨 적었습니다. 그렇게 옮겨 적다 보면 이 시를 좋아할 것만 같은 사람들이 떠오르더라고요. 시를 옮겨 적으며 누군가를 상상하는 것과 옮겨 적은 시를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라서, 아직은 그 모든 엽서를 혼자 간직하고 있는데요. 언젠간 그 시를 선물할 용기까지 생기는 새해였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의 시로는 변윤제 시인님의 <내일의 신년, 오늘의 베스트>라는 시를 추천해드리고 싶네요💞

 폭우를 맞으며 진흙투성이가 된 집에서 싸우는 장면, 국밥을 먹으며 이별을 말하는 장면을 보면서 드라마를 보던 당시에도 이게 내 올해의 드라마가 될 거다, 확신했는데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도 그 생각은 여전해서 가져왔습니다. 드라마 <LTNS>는 사는 게 바빠서 관계마저 소원해진 부부가 떨어진 집값을 벌기 위해 불륜 커플들을 추적하고 협박하는 이야기를 다뤘는데요. 자극적이고 현실적인 소재, 이솜 X 안재홍이라는 믿고 보는 배우들의 조합, 영화 <소공녀>의 전고운 감독 X 영화 <윤희에게>의 임대형 감독의 협업작. 좋아하는 감독님과 배우와 소재가 합쳐졌는데 어떻게 안 좋아할 수가 있을까요.

 기대하고 봤는데도 기대보다 좋았습니다. 불륜 커플들을 쫓아다니며 돈을 벌었는데, 드라마 후반부에 가면 결국 정신적 vs. 육체적 바람을 놓고 본인들의 문제에 직면한 두 사람이 나오는데요. 끝까지 바닥을 치며 싸우는 장면도 좋았지만, 저는 재회해서 국밥을 먹는 이 장면이 너무 좋더라고요. "사무엘, 잘 지냈어?" 153화 제목으로 보냈을 정도로, 잘 지냈어? 라는 짧고 뻔한 인사에 모든 감정이 묻어 있는 것 같아서 저 장면을 참 좋아합니다. 처음 좋아하는 마음을 밝히는 고백 씬보다, 이별 후 솔직한 마음을 밝히는 재회 씬이 늘 더 취향이었던 것 같아요. 비슷한 취향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아마 이 드라마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라 확신합니다. 

 나름 24년에도 영화를 자주 봤다고 생각했는데, 올해의 영화를 고르는 게 어려웠습니다. 영화관을 나설 때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기분을 느낀 적이 드물었던 것 같아서요. 고민하다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곱씹게 된 영화를 골랐습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도쿄의 화장실을 청소하는 한 사람의 일상을 다룬 영화인데요. 출근할 때 하늘을 보고,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꺼내먹고, 차 카세트테이프로 그날의 기분에 맞는 음악을 듣고, 나뭇잎 사이 일렁이는 햇살 사진을 찍고, 야구 경기를 틀어놓는 바에서 맥주를 마시고, 자기 전 책을 읽는 일상을 반복해서 보여줘요. 주말엔 그렇게 찍은 사진을 인화하러 가서, 인화한 사진을 잘 정리해둔 박스에 넣어둡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이렇게 짧은 메모를 적어뒀는데요. '살아있다는 건 좋은 거지, 그림자 밟기 놀이도 할 수 있고 그림자가 겹치면 더 어두워지는지도 알아볼 수 있고. 행복 필승 조합이 늘어가는 어른으로 남을 수 있다면 두렵지 않아.'

 새해 첫 곡을 고심하다가 결국엔 사랑의 편을 들어줬습니다. 가사가 아름다운 곡이기도 하지만, 저는 다른 가사 다 필요없고 그저 '오, 사랑'에만 집중해서 골랐어요. 새해엔 사랑이 더 많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늘 사는 게 쉽지 않을 때면 사랑은 늘 저 멀리 뒤로 밀려났던 것 같아요. 누군가를 겨우겨우 미워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장하다, 생각했던 날들도 많았으니까요. 연말과 새해엔 덜 미워하고, 더 사랑하겠다고 다짐하지만 늘 실패하고 마는 것 같아요. 미워하긴 쉽지만 사랑하긴 어려우니까. 특히 지칠 때면 더욱더. 그러니까 올해는 아예 새해의 노래로 '오, 사랑'을 간결하게 심어두기로 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새해엔 사랑스럽게 살고 싶어요. 요즘도 사랑스럽다는 말을 칭찬으로 쓰나? 듣지도 하지도 않을, 멸종된 칭찬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긴 하지만요. 사랑이 많은 사람이 사랑스러운 게 아닌가. 마음 속에 '오, 사랑'을 품고 사는 새해라면 분명 사랑스럽게 살 수 있을 거라 믿기로 했어요. 사랑스러운 사람들과 사랑을 자주 말할 수 있는 새해가 되길🌻

 Ps. 찾아보니 96화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자고 있을 때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이 떠오른다며 이미 이 노래를 추천했더라고요. 3년이 지나도 여전히 저에겐 잠과 사랑이 중요한가봐요. 

요리는 못 하지만 레시피 구경은 좋아하는데요. 제육덮밥을 알지만 제육덮면은 처음이라면, 마파두부는 알지만 마파두부파스타는 처음이라면, 익숙하지만 낯선 요즘 요리 레시피가 궁금하신 분들에게 신간 [요즘 레시피]를 선물할게요!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누적 조회수 2억 4천만 회를 기록하며 사랑받았던 화제의 레시피를 비롯해, 마제수제비, 명란오이탕탕이 등 익숙한 요리에 상상력 한 스푼 더한 다양한 레시피들을 구경할 수 있답니다! 한 끼 식사, 초대 요리, 해장 요리, 반찬, 디저트 등 장르도 다양하니, 새해 집들이 계획 중이시라면 꼭 참고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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