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국제도서전을 다녀왔습니다. '믿을 구석'이라는 테마를 보자마자 올해는 꼭 가야겠다 생각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구석' 같은 단어를 참 좋아합니다. 어딘가 좀 외롭지만, 어딘가 좀 귀엽기도 한 단어. 나에게 믿을 구석은 무엇인가, 저 테마를 보자마자 생각했습니다. 나에게 믿을 구석은 나 아닌가. 이젠 내 자신의 장점도 단점도 잘 알게 된 것 같은데, 내가 가진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스스로를 믿는다는 점이 아닐까. 내가 나를 믿는다는 것. 믿을 구석이 '나'라도 있다는 것. 그 마음이 어떤 일을 시작할 때, 혹은 지지부진한 일을 어떻게든 끝내야 할 때 가장 든든한 편이 되어 주더라고요. 그렇지만 '구석'은 아주 작은 부분에도 쓸 수 있는 귀여운 단어니까, 자세히 살펴보면 곳곳에 '믿을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만난 수많은 책과 문장들도 '믿을 구석'이 되어줄 수 있고,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물론 '믿을 구석'이 되어주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너른 품을 내어주는 바다도 그렇고, 언제 먹어도 잽싸게 기분이 좋아지는 아이스크림도 그렇고. 작고 귀여운 '믿을 구석'들이 모여 저를 버티게 해주는 거겠죠. 어떤 '믿을 구석'을 지니고 살아가시는지 궁금합니다. 

 2. 부지런히 서울국제도서전 오픈런을 갔다가, 오후엔 버스를 타고 양양으로 떠났습니다. 사실 짐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책을 2권만 샀는데요. 문장을 담은 엽서들과 스티커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영문은 모르겠지만 (부스에 남은 게 틀림없음) 갑자기 건네준 리츠 크래커 바삭김맛까지 야무지게 챙겨서 고속버스를 탔어요. 가는 내내 자긴 했는데, 어느 순간 아파트가 산으로 바뀌는 풍경을 참 좋아합니다. '서울국제도서전'을 갔다가 '촌캉스'를 가는 일정. 트렌드를 쫓아다니는 사람 같나? 트렌드 말고 그냥 내가 좋은 걸 쫓아다닌 거라고 자문자답하며 갔는데요. 양양 터미널에서도 15~20분 남짓 차를 타고 들어간 숙소는 참 좋았습니다. 들어가자마자 문에 청개구리가 붙어있는 곳. 사장님이 직접 딴 상추도 씻어주시고 (사장님도 상추 따는 팁을 유튜브로 배우셨다고 해서 혼자 속으로 즐거워 함) 치즈 고양이가 내 앞길을 가로막는 곳. 주위를 둘러보면 산만 보이고, 그 앞엔 사장님이 열심히 가꾼 꽃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곳. 하루종일 헛소리를 해도 지겹지 않은 오랜 친구와 소파에 누워 [애나벨]을 봤습니다. 공포영화인데 적당히 허술해서 깔깔 웃을 수 있는 공포영화를 보고 싶었어요. (허술하긴 했으나 깔깔 웃을 정도로 재밌진 않았음) 좋았습니다, 그래도. 무지무지. 

 3. 아주아주 한국인 같은 연차였는데요. 아침 10시에 서울국제도서전 오픈런을 갔다가, 바로 양양에 가서 삼겹살 구워먹고, 아침엔 일어나 라면과 커피를 야무지게 먹고, 바다를 딱 30분 보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나름 바다에서 모래에 그림도 그리고 (파도에 지워지길 바랐는데 약 5분 뒤 바로 발자국에 짓밟힘) 바다에서 그네도 타고 (친구가 원피스 입고도 그네 너무 잘 타서 기죽음) 진짜 한국인답게 알차게 놀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다음엔 꼭 2박3일로 와서 그 평화로운 숙소에서 자연을 보며 오래오래 멍하니 있고, 영화도 연속으로 두 편 보고, 바다 보면서 컵라면도 먹고 오래오래 놀아야지. 그래도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잘 쉬고 와서 쓰는 글이라 세상엔 이렇게나 '믿을 구석'이 많다고 말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사실 처음엔 '믿을 구석'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믿을 구석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나조차도 믿을 구석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 때면, 어디론가 벗어나 충분히 쉬고 온다면 작고 귀여운 '믿을 구석'들을 분명히 발견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언제 먹어도 실망시키지 않는 맛집이라든지, 언제 봐도 깔깔 웃고 눈물이 나는 영화라든지, 제가 모르는 '믿을 구석'이 있다면 답장으로 알려주세요🌿

망고네 슈퍼 주인장 드림 

 

 이제 엔딩만을 앞둔 드라마 <미지의 서울>. 사실 전 절반밖에 안 본 입장에서 말할 수 있는 부분이 한정적일 것 같지만, 오랜만에 보고 있는 드라마라 가져왔습니다. <미지의 서울>을 보면서 한국 드라마엔 버티는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는 생각을 했어요. 예전엔 가난을 극복하는 캔디형 인물들이 많았다면, 지금은 그냥 삶 자체를 버티는 인물들이 자주 보이는 느낌이랄까. 이걸 어떻게 극복하고 싶지도 않고, 대차게 해결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지만 또 포기할 수는 없는. 일단 어떻게든 현재를 유지하기 위해 버티는 인물들. <미지의 서울>은 그렇게 버티다가 도저히 버틸 수 없는 한계를 맞이한 쌍둥이 '미래'를 보고 서로의 인생을 맞바꾸기로 선택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인데요. 가족의 기대를 저버린 적 없는 엘리트 '미래'와 부상으로 육상을 그만둔 뒤 방황하던 '미지'는 완벽하게 닮은 쌍둥이지만 정반대로 보이는 삶의 트랙을 달려왔는데요. '미지'는 '미래'가 되고, '미래'는 '미지'가 되어 닮고도 다른 서로의 인생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그렸어요. 한동안 버티는 마음으로 살 때면 <나의 해방일지>에서 "딱 하루 5분만 채워요" 말하던 미정을 떠올렸는데, 요즘은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라는 미지의 말이 떠오를 것 같아요. 나로 사는 게 지긋지긋한 분들, 버티는 마음으로 살고 계신 분들께 이 드라마를 추천할게요🍎

  

Q. 최근에 "유머와 여유를 잃게 될까 봐 불안하다"는 이야기를 했죠. 

= 맞아요.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랑 여유만 잃지 않으면 그래도 한 고비는 넘기겠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좋은 것들을 구슬 모으듯이 계속 모으는 중이에요. 여유와 유머를 잃지 않으려고. 

Q. 어떤 구슬을 모으고 있어요? 

= 책, 영화, 경험. 다독가들에겐 귀여운 수준이겠지만 책을 많이 읽으려고 하고, 여행도 많이 다니려고 해요. 반나절 정도 오롯이 자유 시간이 주어지면 늘 습관처럼 상영 시간표를 봐요. 아, 마음 맞는 사람이랑 대화하는 것도 좋아해요. 그 대화만으로도 확장되는 것이 있거든요. 

Q. 이옥섭 감독과 영화도 자주 본다면서요? 

= 취향도, 귀엽다고 느끼는 지점도 비슷해요. 최근엔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몽상가의 나흘 밤>을 같이 봤어요. 제가 홍상수 감독님 영화를 너무 좋아하는데, 홍상수 감독님이 그분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처음부터 막 느닷없는 장면이 나오고, 영화가 너무 웃긴 거예요. 저는 영화에서 느닷없는 장면, 뭔가 들킨 것 같은 장면을 보여주면 너무 웃겨요. 이게 코미디지, 싶고요. 

 "귀여움이 찾는 눈이 발달한 것 같아요"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클릭했던 인터뷰. 저도 귀여운 걸 정말 좋아하는데요. 의도하지 않았는데 귀여운 일상의 간판들, 주변 사람들의 대화를 엿보고 듣는 걸 좋아해요. 장도연님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비슷하게 느끼는 지점들이 있어서 가져왔어요. 적절한 농담을 하는 사람들만큼 센스 있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요. 농담을 잘한다는 건 그 분위기를 읽고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거니까. 어느 정도 타고나는 것도 있지만, '좋은 것들을 구슬 모으듯이 계속 모아야' 가능한 부분도 분명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널리 알리고 싶어서 <망고네 슈퍼>를 시작했지만, 지금은 의식적으로 좋아하는 것들을 찾고 기록하고 싶어서 계속하는 게 더 크거든요. 이 좋은 것들을 모으는 게 무슨 도움이 될진 잘 모르겠지만, 가끔은 웃기고 아름다운 것들을 이만큼 모아뒀다는 게 믿음직스러운 나의 편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배신하지 않고 언제나 좋은 것들. 내가 슬프고 바닥일 때도 언제나 좋은, 언제든 도망칠 수 있는 나의 편. 위로가 안 될 수는 있어도, 지친 사람들의 곁에 농담처럼 접어서 보낼 수 있는 이야기들. '좋은 것들을 구슬 모으듯이 계속 모은다'는 말이 참 좋았습니다. 그렇게 계속 열심히 모으다 보면 유머와 여유를 갖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파쏘 - 서울 광진구 군자로 174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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